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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7.1_1. title: 진리와 진실의 차이를 알아라. 내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비합리성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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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내리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도 불변하는 것’ 이라는 진리의 정의에 대해서 부정하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은 끊임없이 뒤엎어지고 도전받았다. 중국의 유가사상은 법가사상에 의해 무시당했지만, 수백년 뒤 한나라의 국교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에 영향을 주는 이러한 유가사상은 다시 꼰대소리를 들으며 부정당하고 있다. 진리를 추구하던 소크라테스는 당시 대중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오늘날에는 추앙받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진리라고 추앙받던 예수도 죽임당했다.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흘러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 죽임당했다. 다시 시간이 흐른 오늘날, 전세계의 수십억명이 예수를 진리라고 여긴다. 하지만 예수도 변하지 않았다. 예수를 죽인 자들이나 예수를 믿는 자들 그 누구도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21세기 합리적인 지성인들은 모두 인정한다. 20세기에는 우생학에 따라 장애인과 유전병 환자들에게 단종수술을 시행했다 (참고6,7). 20세기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지던 단종수술이 21세기 사람의 관점에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처사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러니까 21세기에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참고3).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무엇인가를 진리라고 여겨 버린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러한 것들은 사실 진리가 아니었다. 따라서 어떠한 것을 진리라고 여겨 버리는 태도를 스스로 견제해야 한다.
몇몇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21세기는 충분히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회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충분히 성숙하고 합리적인 사회라고 여길만할까. 모든 국가에서는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법으로써 제정해 두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큼직한 법적 이슈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당장 몇년 전 우리나라에 있었던 셧다운제 해프닝이 생각난다. 셧다운제가 시행되던 당시의 공론을 보면 셧다운제가 분명히 충분히 합리적이라는 기조가 깔려 있었다. 딱 10년이 채 안돼 없어진 이 셧다운제라는 법은 악법으로 폄하받는다. 그 사이에 아무런 진리도 변하지 않았다. 게임이라는 것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법 폐지 당시 여론을 보면 게임은 하나의 문화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법 제정 당시 여론처럼 게임은 실제로 사회 악이 될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여론의 물살을 맞고 법이 제정됐고, 여론의 물살을 맞고 법은 폐지됐다 (참고3). 2019년 민식이법, 2021년 개인형 이동장치법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미 사람은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편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 하나의 국가에서 가장 진리를 추구하며 합리적이어야 하는 법조차도 진리를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고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무려 2천 5백년 전에도 제자백가는 사상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근현대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기원전 5세기 선진시대 백가쟁명의 21 세기 버전일 뿐이다. 어떠한 사상의 성공 여부는 굉장히 일시적일 수 있고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이미 알려져 있음에도 사람들은 우파 좌파 명찰을 달고 열심히 싸운다. 자신들의 사상이 ‘진리에 가깝다’ 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굉장히 재미있다 (참고1, 2). (여담 참고4). 맹점은 인간 개인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보다 조금 더 현명할 22세기 사람들은 21세기의 어떤 생각을 인류의 거대한 실수라고 여길까?
인간은 수조개의 우주를 들여다보는 닥터 스트레인지나 문명 게임처럼, 자유주의를 선택한 무한한 우주와 신자유주의를 선택한 미래를 수백~수천년씩 시뮬레이션해볼 수 없다 (심지어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사실’ 들을 수집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것이 ‘옳은’ 길인지 판단하는 것에는 또 정답이 없다. 인간이 전부 죽어 버리고 자연환경만 남아 있는 미래를 본 환경 운동가는 그러한 미래를 긍정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모두의 가치는 다르다.). 정치는 물론 과학에서도, 인간은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인간의 한계’ 에 의해 진리는 가려져 왔다. 한단계 더 깊은 지식을 알아낼 수 있는 기술이 쌓이기까지 인간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도는 줄 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뉴턴의 고전역학이 진리인줄 알았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며 신이 주사위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어린아이도 경험적으로 ‘진리’ 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대부분 진리의 일부에서 떨어져 나온 ‘사실’ 이었다는 ‘사실’ 을 알 수 있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 이 ‘진리’ 로 여겨지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참고3).
모든 맹인이 진실(Fact, ~=사실) 을 말한다. 하지만 진리는 아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니고, 닥터 스트레인지조차도 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정답은 얻기 어려우나, 책 <자유론> 이 주장하듯 - 모든 사람들은 본인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로 주입하려고 하지 않는, 타인의 의견을 들을 때에는 마음의 영점을 맞추어 두고 경청하며 질문하는 - 행동과 태도로부터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맹인이다. 내가 경험한 팩트와 의견을 넘어 상충되는 팩트와 의견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코끼리는 뱀같을 수 있구나. 심지어 코끼리는 양탄자같을 수 있구나. 처럼 말이다. 우선 나부터 친구들의 형편없어 보이는 생각 또한 경청해 보고, 왜 그렇게 생각했어? 라는 질문을 건네 보는 습관을 기름으로써 이 결론을 꾸준히 실천해보자.
진리는 구의 중앙에 있지만 현상과 팩트들은 구의 표면에 존재한다. 상충되는 현상과 팩트들이 나타나도 동일한 진리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 학문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전해 나간다. 이 모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세 가지이다. (1) 진실과 진리는 다르다는 것, (2) 동일한 진리에도 상충되어 보이는 진실이 나올 수 있다는 것, (3) 진실을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의 주장을 내 의견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틀릴 수 있다’ 는 생각이 몸에 강하게 베어 있어야 한다. 진리에 단 한 발짝이라도 가까워지고 싶다면 반대 의견에 본능적으로 나 자신을 변호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나의 과거 주장을 번복하는 것이 두려워 이전 입장을 고수하지 않을 수 있도록, 세상 만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고5:피드백 루프). 나의 의견과 논리가 아무리 확고하더라도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즉, 진리와 진실의 차이를 나 스스로 진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꾸준히 밝혀지는 인간의 편향되고 불합리적인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진실과 진리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참고
1.
2.
4.
진보론자를 보면 보수론자의 입이 되어 이런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묻고, 보수론자를 보면 진보론자의 입이 되어 저런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한테 일베충이라고 놀리는 친구도 있고, 이재명 문재인을 찬양한다고 놀리는 친구도 있다. 그나마 나의 이상한 습관을 조금 아는 친구들은 이러한 내 습관을 ‘반박병’ 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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