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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나도 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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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1 11:32
last edited
2023/07/1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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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쉬움
이과: 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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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몽

얼마 전에 꿈을 꿨다. 친하게 지내는 독일 교환학생 친구가, 문을 잘 잠그고 다니지 않는 나더러 ‘여기는 한국이 아니야!’ 라고 핀잔을 준 적이 있다. 물론 건물 외부에서 내 방까지 가기 위해서는 보안장치가 작동중인 문을 네 번씩이나 통과해야 할뿐더러,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끼리 같이 생활하는 최종 관문이 있기 때문에 내 방까지 도둑이 들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독일 친구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이야기가 꿈에 나왔다. 이번에는 방문이 아니라 창문이었다.
나는 환기를 위해 종종 학교에 가기 전 내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가곤 했는데, 마찬가지로 5층에 위치한 내 방에 도둑이 들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꿈에서 그 독일 친구가 나에게 ‘창문좀 닫고 다녀라! 여기는 한국이 아니야!’ 라고 또 핀잔을 주는 것 아닌가!
여느 날처럼 학교에서 집에 오후 8시가 넘어 돌아와 창문을 닫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창문을 닫기 전에 좋은 공기를 한번 더 코에 집어넣고자 고개를 창문 밖으로 빼고 아니 도대체 여기로 도둑이 어떻게 든다는거야! 라고 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순간, 발코니 구석 어두컴컴한 곳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검은 덩어리와 빛나고 있는 하얀 눈동자를 발견한 것이다! 황급히 고개를 방 안으로 다시 집어넣고 창문을 쾅 닫아 잠그니 잠에서 깨어났다.
이 이야기를 그 독일 친구한테도 이야기하고, 한국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했다. 이때까지 이런 사건이 나에게 일어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파리는 나에게 별다른 이유없이 해꼬지를 한 적이 없었다. 한달이 넘도록 살면서 남들 다 겪는다는 인종차별은 물론이거니와 소매치기를 시도하려는 낌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첫날에 길에서 어깨빵 당했던 거 빼면…

유럽에서 친구가 호스팅하는 공간에 가는 것

유럽에서 그 흔히 일어난다는 소매치기를 내가 당한 것이다. 사건은 벨기에행 버스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어쩌다가 벨기에에 가게 되었는가? 대학에 입학하고 1학년 때 연합동아리 활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만난 인연들 중 가까워진 친구가 하나 있었다. 이 친구는 불문학과 전공이었는데, 프랑스에 교환학생도 다녀온 뒤 최근에는 불어권인 벨기에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와 호텔에서 일하고 있었다.
2022년의 대화시간을 보면 시간대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이 친구는 자신과 남자친구가 살고 있는 플릿(공유 주방을 사용하고, 화장실과 침실을 별도로 사용하는 유럽의 주거형태) 방 하나가 빈다고 이야기하며, 벨기에에 오면 숙소는 물론 투어를 제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함께하는 동료 없이 혼자 타지 한복판을 여행할 때 현지에 거주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이 된다. 더구나 숙소까지 제공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벨기에에 1년간 머물렀던 친구의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은 너무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예민한 상태

도난과 벨기에 여행 이야기에 앞서 내가 굉장히 예민하고 피곤한 상태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유럽에 교환학생을 떠나고 싶어하는 친구들에게도 현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 덧붙인다. 더구나 피곤한 상태는 비상 상황에서 올바른 대응을 잘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1.
한국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 우선 한국에서 하고 있는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로 유럽에 오다 보니.. 이것이 계속 여행을 준비하는 나의 정신적 리소스를 꾸준히 갉아먹었다.
2.
시험기간으로 인한 반복된 새벽 공부, 하지만 좋지 않은 성과로 지쳐 있는 심신: 내가 다니는 학교의 커리큘럼은 굉장히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지 학생들에게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이전 내용을 모른 채 다음 수업을 듣는 경우 아무리 경험이 많은 전공자라도 힘들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클릭) 혹시 공과대학 독자의 경우 어떤 맥락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아래 내용을 첨부한다.
안그래도 학교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은 내용인데, 1학기 내용을 모두 독학하고 2학기 내용을 따라가려고 하는데다 영어로 배워야 하니 시험기간이 더더욱 지치는 것이었다. 한국은 하나의 수업 당 3학점을 초과하는 경우가 크게 없지만, 외국에서는 한 과목이 한국 학점으로 환산해도 5~6학점으로, 웬만한 졸업 프로젝트보다 더 많은 리소스를 사용해야 하는 과목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도 복병이었다.
평소에는 프랑스 현지에 적응하랴, 한국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을 하랴 바빴다. 프랑스 현지 친구들에 비해 공부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기본적으로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시험 결과도 당연히 좋지 못했고, ‘나는 도대체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했나…’ 하는 생각이 계속 누적되어 가는 상태였다.
3.
기숙사에서 나오는 녹물: 숙소는 조금 오래된 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물을 틀었더니 시뻘건 물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여기서 하루라도 더 있고싶지 않았다. 어찌어찌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을 버텨내며 머리는 감았지만 도저히 찬물을 몸에 묻힐 엄두가 나지 않아 샤워를 3일째 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시험도 일찍 끝났겠다, 괜히 더 미룰 필요가 없었다. 앞서 피곤함에 절여져 있다고 했는데, 버스에 탑승하면 잘 시간을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무리 벨기에 숙소 컨디션이 별로여도 여기보단 나을 것이다. 곧바로 벨기에로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레지던스에 사는 학교 친구들 톡방. 아예 단수가 되었다고 하는 친구도 있다.
모든 것들이 고장나는 레지던스. 수도에 이어 세탁기와 와이파이까지 맛이 갔다.
4.
툭하면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 스마트폰: 한국만큼 IT 인프라가 잘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다들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만 정말 연결의 품질은 더할나위없이 형편없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라. 영미권도 아닌 나라의 한복판에서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데 인터넷이 멈춰버리면? 그야말로 길을 잃는 것이다. 길에서도 종종 먹통이 되곤 하는데 실내는 오죽할까. 가게에 들어가면 인터넷이 멎어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그 흔하디흔한 공공무료와이파이도 없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뿐 아니라 벨기에의 수도 브리쉘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 특정 통신사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내 폰은 나름 갤럭시 S22이다. 최상급 스마트폰은 아니지만 적어도 폰에 문제가 생기는 것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싸구려 폰은 아니라는 의미다. 높은 확률로 통신망 그 자체의 문제일 것이다. 다음에는 아이폰을 사야겠다. 여튼, 벨기에행 버스 터미널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 탑승 시간은 다가오는데, 길 한복판에서 와이파이가 멈춰 버렸다. 처음에는 그냥 언젠간 나아지겠지 하며 승강장으로 걸어갔지만 점점 불안감이 커졌다. 발걸음은 느려졌고 금세 울상이 되었다.
5.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여행하는 것에 대한 내적 불만족: 약간 개인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눈요기만 하는 여행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훌륭하고 멋진 것을 보는 것은 너무 즐겁다. 솔직히 말해서 미술작품, 건축물, 교회, 고성 등을 아무런 맥락 없이 살펴보는 것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매일같이 업데이트하는 포스팅에 관심이 없는 나에게 뭐가 재미있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무언가를 공부하고 견학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벨기에행 버스가 있는 터미널까지 걸어 가며 건축과 미술에 대해 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파리 끝자락에 있는 집에서 버스 터미널까지 캐리어를 끌고 가며 인터넷이 터지지 않아 어느새 멈춰버린 서양미술사 강독 화면은 점점 나를 조바심나게 만들었다.
6.
빠듯한 일정: 시험이 1시쯤 끝났고, 함께 시험을 본 2학년 친구들과 다같이 밥을 먹고 난 뒤, 나를 호스팅해주는 친구를 위해 마트에서 브루고뉴 그랑크뤼급 와인을 하나 샀다. 내가 프랑스에서 산 와인 중 가장 좋은 와인이었다. 가격은 20유로 남짓이었다. 한국에서 구한다 치면 최소 8~10만원정도는 줘야 살 수 있는 와인 아닐까.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프랑스에서 왔다는 느낌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것들을 제공해 주는 사람들에 대한 성의표시로 부족할 것 같아서 조금 특별한 것을 선물하고자… 프랑스의 배(Pear) 3종을 하나씩 골라담았다. 한국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다양한 서양 배다. 혹시라도 들고갔다가 품질이 나빠져서 다 버려야 할지도 모르니 한 개씩만 귀엽게 샀다. 마트에서 나오니 5시였다. 버스 시간을 최종 확정하고 가는 방법을 알아본 다음 짐을 싸기 시작하니 6시, 버스 출발 2시간 전이었다. 어떻게든 유럽을 즐기고 말겠다는 조바심이 앞선 강행군이었다.
버스 출발 20분 전. 집을 나와서 1km 쯤 걸어간 순간부터 갑자기 휴대전화가 먹통이 됐다. 분명히 넉넉하게 나왔는데 인터넷이 안되는 환경에서 헤메다 보니 출발시간이 굉장히 임박한 것이다.

이동

버스 터미널이 정말 정말 길다
어찌저찌 도착한 버스 터미널에 겨우겨우 시간 내에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자 승객들이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하나씩 탑승하기 시작했다. 문득 소매치기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지만, 사람들이 너무 위화감 없이 짐을 차에 실었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짐을 슥 넣었다.
경고하는 친구
노트북과 여권 등이 몽땅 들어 있는 배낭은 차내에 들고 타기로 한다. 벨기에에 살고 있는 친구의 경고가 있었기에, 이 가방은 버스 윗 선반에도 올리지 않고 그냥 꼭 껴안았다. 평소 바쁜 일정 때문에 항상 미루어 두었던 프랑스에 대해 공부도 하고, 벨기에에 대해서도 조금 공부를 하다가, 유럽 여행 시 차량이나 바이크 등 개인 교통수단을 렌탈하는 경우 장단점과 가격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다가 잠에 들었다. 여담으로 다들 프랑스를 여행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개인 이동수단이 있을 때 프랑스를 더욱 잘 구경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히려 대중교통만으로도 관광하기 좋은 것은 대한민국 아닐까. 속초, 강릉, 부산, 전주, 인천, 안동, 정선, 양양, 동해, 여수, 제주…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모든 관광지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렵지 않다. 툭하면 대중교통 노동자의 시위가 터지고, 가격이 예매일에 의해 항공권처럼 계속 변경되는 프랑스의 교통 시스템에 비해 고객 입장에서 느끼는 체감은 사뭇 다르다.
밖에 뭐라도 보일줄 알았는데 전혀 안보인다. 창밖을 감상하고 싶다면 밤은 절대 비추천이다.
아무튼, 3시간 30분 어두운 밤길을 환승이나 정차 없이 장장 달려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밤거리의 첫인상은 그냥 평범한 유럽이였다. 버스가 길가에 멈춰섰다. 사람들 틈에 섞여 버스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각자의 짐을 꺼내고 있었다. 짐이 하나둘 빠지는데 내 캐리어가 보이지 않는다.
음..? 내 물건을 누군가 미리 빼 둔건지, 누군가 훔쳐간건지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버스 정류장 옆에 걸터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에 여유롭게 담배를 피는 영국 발음의 노년의 여성이 있었다. 그 옆에는 어떤 건장한 흑인 남성이 서 있었다. 여성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 짐 못 찾았니?”
“네…”
“우선 저 버스 안에 잘 찾아봐!”
정류장에 멈춰 있던 버스가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제발… 버스 안에 있길… 내가 못 발견했던 것이길… 울상이 되어 미친듯이 버스를 따라 뛰어갔다. 300미터정도 달리던 버스가 신호에 멈춰섰다. 창문을 두드리니 한숨을 푹 쉬는 기사의 얼굴에는 ‘또 이런 자식이 있네…’ 라는 표정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그래도 기사는 길 한가운데에서 버스를 멈추고 트렁크를 열어 주었다. 트렁크에 기어들어가 샅샅이 뒤졌지만 내 짐은 없었다.
떠나가는 버스. 혹시라도 번호판을 기억하면 도움이 될까 하여 멀리서 망연자실해하며 찍은 사진
버스를 따라 300미터가량을 질주했던 길을 다시 돌아와 보니 영국 발음의 여성과 흑인 남성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내려 두었는데 내가 못 찾은 것은 아닐까 근처를 뒤졌지만 마찬가지로 찾을 수 없었다. 망연자실해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나를 보며 둘이서 뭐라뭐라고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주워들은 얘기 하나는 여성이 “아냐 내가 버스 탈때 쟤 뒤에 있었는데 캐리어 짐칸에 싣는 것 봤다” 고 남성에게 말하는 이야기,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브뤼셀 미디역에서 자신들이 보았던 소매치기 사건들이 꽤나 있다, 여기는 맨날 한명씩 그렇게 당한다는 이야기 정도를 주워들었다. 어서 이 위험한 곳을 벗어나야 했지만 정신을 차리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람들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고 행선지를 물었다. 여성과 남성은 일단 같은 방향이라면 최대한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친구의 주소를 보여주며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다같이 트램을 타면 될 것 같다며 길을 나섰다.
새벽 12시, 막차였다. 어떤 거지가 슬금슬금 걸어와 내 건너편에 앉더니 헤벌쭉 웃으면서 내 다리를 자신의 발로 툭툭 건드렸다. 나를 도와 준다던 흑인 남성이 ‘저리 꺼져!’ 소리쳤다. 집시는 아랑곳않고 헤헤 웃더니 발을 슥 들어 보인다. 밑창은 다 까져 발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신발이었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토가 쏠렸다. 밑창 까진 신발을 다시 바닥에 툭 던져 놓더니 다시 나를 툭툭 찬다. 흑인 남성은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벌떡 일어나서 건들지 말라고 거지에게 화를 냈다. 거지도 자리에서 스멀스멀 일어났다. 거지의 키가 조금 더 컸다. 거지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흑인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아 보며 헤벌쭉 웃고 있었고 흑인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흑인은 프랑스어인지 영어인지 모를 말로 집시에게 뭐라뭐라 욕을 하고, 주위 몇 없는 승객들의 시선이 이리로 쏠렸다. 흑인이 물러서지 않고 압박해오자 집시는 다음 정거장에서 배실배실 웃으며 열차에서 내렸다. 나는 나 자신을 한국에서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고 비전있는 사람임을 표방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집시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아무 욕심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그 집시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두려워 보이지 않았다. 집시는 흑인이 내린 뒤로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씩씩거리며 한 5분정도 지났다. 그제서야 흑인은 입을 열었다. ‘나는 이게 익숙해서 그냥 이럴 수 있는데 너는 절대 모르는 사람한테 대들고 싸우면 안돼.’ 걱정하는 친구에게서는 계속 연락이 오며 진동이 울렸다.
두 정거장 정도가 지났다. 내가 내려야 하는 정거장이었다. 흑인 남성은 약간 고민하더니 자신은 원래 한 정거장 더 가야 하는데, 같이 가 주겠다며 내렸다. 조금 걸어갔다. 지하철 출구가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반복해서 외쳤다. ‘You have to give me 20 euro!‘ 이정도 서비스에 그정도는 충분하지 않냐!’ 라고 하는 그 건장한 흑인 남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역시 공짜 선의는 없는 것인가. I agree, I agree. It was worthy. … 이때 당시에는 캐리어를 잃은 충격이 너무 컸고, 어떻게든 안전하게 친구가 있는 곳까지만 가자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 이 사람은 집시로부터 나를 지켜 주었다. 내 지갑에는 10유로밖에 없었다. 앗, 친구로부터 전화가 온다. 그 사람은 10유로를 일단 가져갔다. 돈을 뽑으라고 한다. 바로 앞에 ATM 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ATM 앞으로 비실비실 걸어갔다. 와중에 계좌 비밀번호를 누를 때에는 그 사람은 뒤로 휙 돌아서 주는 매너를 보였다. 왼손에 들린 스마트폰에서 계속 진동이 느껴진다. 돈을 뽑았다. 20유로권 1장이었다. 20유로를 줄테니 10유로를 내놓으라고 하니까 다시 돌려주었다. 입금을 완료하니 ‘버거킹까지 데려다 줄게.’ 라고 하며 나를 약속 장소까지 바래다 주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그 사람은 자신을 소개하고 좋은 여행을 즐기길 바란다며 인사를 보내고 자신의 원래 목적지로 향했다. 50m 가량 앞에 친구가 서 있었다. 너무 반가운데 반가운 티를 낼 수 없었다. 온통 진이 다 빠져 있었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흑인 남자 이야기를 해 주었다. 관광객 티가 나서 호구로 본 것이라며 혼이 났다. 맞다. 그런데 진짜 그 사람은 뭐였을까. 내가 받은 느낌은 처음에는 그냥 자신이 가는 길에 그냥 도와 주려다가 에랏 모르겠다 하고 질러 버린 것 같달까. 그런데 뭐 눈앞에서 400유로(약 55만원)에 달하는 내 소중한 옷들과 캐리어를 방금 전에 잃은 사람에게 20유로 정도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는 친구가 놀러온 나를 위해 간단히 벨기에의 이런저런 명소들을 소개해 주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대부분의 피같은 시간을 쇼핑에 소비해야만 했다. 당장 다음날 입을 윗도리 아랫도리는 물론 내의, 양말, 속옷 한 장 없었던 것이다. 이날 브뤼셀 번화가 한복판 매장 4~5개를 오가며 장장 4시간에 걸친 쇼핑에 들인 돈은 255유로였다. 나는 원래 어디 여행을 가든 그냥 쇼핑에 욕심이 없다. 면세점에서 술 한병 정도만 사들고 돌아오는 편이기 때문에 쇼핑에 사용하는 돈은 항상 0에 가깝다. 지금껏 가장 많은 돈을 하루 쇼핑에 사용한 날이었다.
쇼핑을 마치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펍에 가서 벨기에산 맥주 10종 테이스팅도 해보고, 브뤼셀 친구의 페어웰 홈파티에 친구의 친구로 참석한 뒤 유럽 국룰 2인승 전동킥보드를 이용해 귀가했다.

경각심

유럽이 화려한 문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프랑스의 오르세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 중 프랑스에서 태어난 미술가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지도를 들추어 복잡하게 그어진 국경선과 끊임없이 일어났던 전쟁들만 보아도 유럽에서 얼마나 많은 지역간 사건사고들이 있었는지 인접국들은 물론 유럽 대륙을 통틀어 얼마나 많은 상호작용들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나는 사실 그 점이 부러웠다. 주변국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은 국가경쟁력 측면에서 큰 손해라고 생각했을 뿐더러, 조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폐쇄적인 사고를 확립하기 너무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벨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는 4~5개의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런 국가의 단점은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관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한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한국이 공항만 철저히 검문하면 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달리말해 완전히 고립되어 난민 없는 국가의 장점은 다름아닌 치안과 일관된 사회도덕적 통념을 모두가 공유한다는 점이기도 하다.
다행히 ‘정말 큰 것’ 을 잃지는 않았다. 유럽 한복판에서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는 것은 정말 국제 미아가 되는 지름길이다. 또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 중 가장 비싼 노트북과 같은 물건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경호 서비스’를 제공한 사람에게 그냥 제공해 버린 20유로는 말 그대로 입국 비용이라고 치고, 캐리어는 10만원, 양말과 속옷 10만원, 안에 들은 옷들 15만원. 총 35만원을 소비한 셈이다. 더 큰것을 잃기 전에 얻은 피드백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해야 남은 시간을 더욱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돌아가면 예전처럼 노트북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음료를 주문하러 갈 수 있을까?

조언

첫째, 버스나 기차를 타는 경우 (특히 큰 도심) 역사에서 어리버리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미디역은 벨기에의 가장 큰 버스 역사이다. 대부분의 분실사고가 여기에서 발생한다는 말은, 딱 첫날과 마지막날만 조심하면 대부분의 여행 기간동안 물건을 잃어버릴 일이 많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리 위험지역에 대해서 대사관 홈페이지 등을 통해 확인한 뒤 다음 사항을 살피도록 한다. (1) 당연히 중요한 짐(아래 서술할 보안등급 1등급짜리의 소지품)은 꼭 안고 탄다. (2) 터미널에 충분히 일찍 도착하여 버스에 짐을 싣을 때 최대한 안쪽 혹은 중앙으로 밀어넣을 수 있도록 한다. (3) 그리고 하차 시에는 반드시 ‘가장 먼저’ 내린다. 나는 (2) 와 (3) 을 지키지 못해서 짐을 잃어버렸다.
안전한 버스는 없지만, @2/24/2023 기준 blablacar의 버스는 아직 체계가 덜 잡혀 있다고 한다. 플릭스버스의 경우 모든 손님이 하차한 뒤 트렁크를 개방하도록 교육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blablacar을 이용한다면 하차 시 버스기사가 냅다 트렁크를 열어버리기 전에 후다닥 내려야 한다. 버스 트렁크가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거기에서 날치기해가는 경우도 빈번하고, 같은 버스에 탑승한 뒤 가장 먼저 내려 버스 트렁크에서 가장 가벼워 보이는 짐을 가져가는 경우가 있다.
주벨기에 유럽연합 대한민국 대사관의 벨기에 안전여행 안내
둘째, 짐을 안 잃어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짐을 잃어버렸을 때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소지품별로 보안 등급을 나누어 관리하도록 하자. 다행히 도난당한 나의 캐리어에는 3등급 물건들만 담겨 있었다. 여행에는 보통 여러분이 아끼는 옷들을 가져오지 않는가. 그런 옷들을 잃어버리는 마음은 정말 참담하지만, 아무래도 스마트폰 없는 삶보다는 낫다.
1등급
반드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물건
스마트폰, 노트북, 여권, 주 신용카드
2등급
복수개를 가지고 있는 물건
비상용 신용카드
3등급
복사가 가능하고 가격대가 낮은 물건
여권 사본, 옷들
셋째, 여행자보험/유학생보험/장기여행자보험을 들 때 ‘도난’ 보장이 계약에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하자. 없다면 특약에 추가하자. 그리 비싸지 않다. 나는 그냥 필수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 캐롯 장기체류보험을 들었는데 그냥 당연히 포함되어있을줄 알았던 도난과 파손에 대한 계약사항이 없어서 아무것도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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