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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가치란 것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느낀 점들

created
2023/07/12 05:12
last edited
2023/08/08 08:04
difficulty
문과: 쉬움
이과: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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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식상한, 박물관과 미술관의 양과 질

로마 조각이 전시된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실
프랑스에는 인천정도 규모쯤 되는 리옹(Lyon)이라는 도시가 있다. 리옹에 3일정도 머물며 박물관 한두개를 들렀다. 큰 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로마 문명의 유물, 이집트 문명의 유물 등 희귀한 유물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수정도의 규모쯤 되는 니스(Nice)라는 도시에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 도시에도 어김없이 미술관들이 여럿 있었다. 5일정도 머무는 일정이라 여유있기도 하고, 꽤 알려진 작품이 많다고 하여 방문을 해 보았다. 어김없이 한국에도 잘 알려진 화가들의 작품들을 찾을 수 있었다.
유럽에서 작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작품과 유적들이 정말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느낀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단순히 깨끗하고 잘 관리되었다는 점을 넘어 다양성, 작품, 설명, 기획전 모두 다 엄청나게 많고 훌륭한 컨텐츠들을 가지고 있다.
<닥터 후>, 시즌5 10화 Vincent and the Doctor: 2010년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온 빈센트 반 고흐. 저 배경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이 진짜 다 있었을 줄이야.

둘째, 식상한, 영어의 중요성

모네 박물관에 불어/영어로 작성되어 있는 설명
박물관 내 모든 문서들이 기본적으로 해당 프랑스 국문으로 작성되어 있고, 그리고 영문 설명이 나란히 작성되어 있다. 작품을 감상하던 중 모르는 것이 있으면 찾아봐야 한다. 하지만 관광의 나라 프랑스의 박물관에서조차 한글 자료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문자로 된 설명이 없다면 오디오 가이드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영어에 비해 컨텐츠가 부족하다. 한국어 가이드를 지원하는 프랑스 내 박물관은 루부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오페라 가르니에밖에 없었다. 가이드를 지원하는 작품의 수에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았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잠깐 열렸던 기획전에 전시된 작품 설명도 한국어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다. 기획전 작품들은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만 지원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영어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3시간 4시간을 돌아도 하나의 구역을 다 볼 수 없었다. 만약 영어를 잘 읽고 잘 듣는다면 단시간에 양질의 정보를 훨씬 더 많이 습득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의 초안을 작성한 날에도 영어 오디오북을 빌려두고 작품 네댓개에 대한 설명만 두세 번씩 돌려 듣느라 1시간 반을 넘게 소비하고 박물관에서 퇴장했다.
궁금한 것이 많은 사람이라면 오디오 가이드를 사용하더라도 이런저런 의문들이 생겨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게 되는 일들이 빈번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발견한 작품들과 관련한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많은 경우 한국어 위키피디아 문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섹션이 그냥 텅 비어 있다.
위키피디아 모바일의 좌상단 버튼을 눌러 언어를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한번 언어를 바꿔 보자. 특정 언어를 아예 지원하지조차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언제나 프랑스어와 영어는 지원된다. 프랑스어야 당연히 프랑스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과 관련된 내용이니까 그만큼 잘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는 왜? 가성비가 참 좋은 언어다.
이러한 시간들의 누적은 프랑스어를 더 잘하자라는 생각보다 영어를 더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많이 드는 시간으로 굳어갔다. 이 글을 쓰는 것부터 나의 일이나 친구들과의 소통까지 한국어를 안 쓸 수가 없는 상황인 것 같다. 이런 환경에서는 영어가 늘기가 어렵다. 한국에 돌아가서가 걱정이다.

셋째, 식상한, 역사적 무지

3~4개의 양식을 가로지르는 시간동안 증축된 독일의 아헨 대성당
어느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든 내가 모르는게 너무 많다는 생각으로 많이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림을 감상한다면 적어도 이 작품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를 고려하여 감상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혹자는 그냥 미술작품 그 자체에 집중하며 감상을 해야 하며, 사조나 역사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생각을 바꾼 새로운 관점’ 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편이다. 실제로 많은 작품들이 역사적 배경을 잃어버리면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잘 만든 비파형 동검이라도 이것이 청동기에 만들어졌다는 맥락을 잃으면 그 유물의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을까. 꼭 비파형 동검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 자체로 너무 화려하고 멋진 것들을 많이 보고 살아간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거시적 역사에 너무 무지하고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런 것들을 이미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새롭게 접한 정보를 이용하여 시냅스를 체결하는 일이 굉장히 쉬울 것 같다. 기존에 알고 있는 정보와 새롭게 알게 된 정보를 연결할 수 있는 귀중한 자극인데 내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많아야 다음에 무언가를 볼 때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법이다. ‘내가 어느 미술관을 가봤어.’ 혹은 ‘내가 어느 박물관을 가봤어’ 라고 말하기 위해 방문하는 것이라면 물론 상관없다. 그것도 그 자체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냅스 측면에서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두세시간씩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관람이 될 수 있다.

넷째, 내가 유럽중심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근대적인 건물 퐁피두센터 너머로 보이는 몽마르트 언덕 성당
유럽을 방문한 많은 친구들은 이런 측면을 들어 ‘유럽의 문화가 한국의 문화보다 훨씬 낫다, 이러니까 선진국이다’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해볼수도 있는 것 아닐까.
아니, 너 한국에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가 보기는 했냐? 당연히 유럽이니까 유럽 유물들이 많을 것이고, 이집트와 교류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집트 문물이 많은 것이겠지! 한국도 우리나라와 관련된 유물들이 충분히 많아.
나는 절대적으로 우수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많은 친구들이 여행객의 입장으로 프랑스에 놀러 왔고, 내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화할 시간도 많았다. 몇몇 친구들은 유럽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여성의 신체 노출이나 성소수자에 덜 민감한 유럽의 다양성 문화, 유럽풍의 건물 등, 유럽이 전반적으로 한국보다 좋은 이유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이렇게 돌려 생각할 수 있다. 한국의 높은 자살율로 대변되는 강력한 경쟁 구도와 높은 학구열이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에 오히려 도움을 주지는 않았을까? 서로 눈치를 보고 남의 시선을 신경쓰는 집단주의, 다른 문화를 배격하는 민족주의가 전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지 않았을까? 건물과 도로 사이의 공간 하나 없이,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 하나 없이 다닥다닥 붙여 지어서 낡고 헤져 바꾸고 싶어도 바꾸지 못하는 프랑스 파리의 구식 건축물이 20~50년마다 쉽게 철거하여 에너지효율적, 공간효율적, 생활효율적 건물을 용적율 건폐율이라는 법과 함께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하며 널찍하게 쌓아올리는 대한민국의 건물들보다 우월하고 다양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유럽 사람들도 불과 몇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과 달리 문화재를 보존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크게 없었기 때문에, 그냥 부수기 아까워서 쓰는 개념이 강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들이 가진 박물관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국가의 배를 불려 주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박물관에 자주 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냥 뭔가 부러웠다.
누군가는 강경하게 이런 생각을 지지하며, 유럽의 역사적 문화가 우월한 것이라는 생각을 유럽중심주의/서구중심주의적 사고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오히려 객관적이지 못한 사고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관념인 능력중심주의. 이것이 송나라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까 저 멀리 떨어진 프랑스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까? 답은 명쾌하다. 거리는 중국이 가까워도, 우리나라에도 상공업이 발달했음에도 우리는 유럽에서 다시 시작된 민주정치 속에서 서구에서 시작된 자동차를 타고 유럽에서 제안한 경제모델과 유럽에서 기원한 법이라는 틀 아래, 합리주의적으로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살아간다. 무엇이 우월하다 천하다를 떠나, 그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기원한 생각들은 바로 옆동네 중국의 생각들과 사건보다 오늘날 한국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나는 그러한 흔적을 박물관과 미술관이라는 동네에 풍부한 흔적과 함께 고스란히 들고 있는 유럽이 부러운 것이다.
글을 쓰는 데 참고한 자료입니다.
6.
<닥터 후>, 시즌5 10화 Vincent and the Doctor: 자료 아이디어 제공 김다현
글을 쓰는 데 반영된 생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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