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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이 다르면 서로를 신뢰하고 피드백을 수용하면서도 소통이 되지는 않는다.

created
2025/01/25 02:46
last edited
2025/01/26 10:54
difficulty
문과: 쉬움
이과: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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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일주 중 방문했던 《당신들의 천국》 배경,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

당신들의 천국

소록도와 한센병 환자 수용원을 배경으로 한 이청준의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 보건과장 이상욱과 원장 조백헌은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면서도 소설 전반에 걸쳐 있는 묘한 긴장감이 해소되지 않은 채 작품이 마무리된다. 작중 조백헌은 언제나 이상욱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멋진 리더다. 이상욱도 원장을 존중하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간언한다(참고1). 하지만 둘은 끝끝내 서로의 고개를 시원하게 끄덕이게 만들 만큼의 진정한 소통을 한번도 성공하지 못한다. 이상욱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편지에도, 이상욱이 생각하는 소록도의 문제를 조백헌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 있으나, 이 편지의 존재 자체가 문제를 재임기간 내 조백헌이 해결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가 조백헌이 형편없는 인물이기 때문은 아니다. 조백헌은 피지배인들을 잘 살게 하겠다는 진정성 있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탈권위주의적 지도자다. 섬 사람들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변화에 폭력과 강제를 동원하지 않겠다는 철학을 가진 영웅이다(참고2). 제3자의 따끔한 충고를 듣고 적극적으로 변화하고 행동하는 사람이기까지 하다.
소설에는 모든 등장인물이 경계하는 동상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조백헌이 원장으로 부임오기 전까지, 이전 병원 원장들이 환자들을 이용해 자신의 업적을 세우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상징물이 동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독자들이 동상을 단순히 ‘권위의 상징’ 정도로 해석하곤 하지만 나는 지나친 단순화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조백헌과 이상욱이 가지고 있는 동상의 의미가 다름을 끊임없이 언급하지만, 조백헌과 마찬가지로 한센병에 걸려 본 적 없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설의 한센병 환자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조백헌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동상의 의미를 소설에서 다루는 동상의 의미라고 취급하곤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아닌 ’당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듯, 그 동상을 경계하는 세상은 나만의 천국이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백헌에게 동상은 우리가 이해하듯 권위주의의 유형 상징물이 맞다. 한센병 환자들이 섬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만들겠다는 진심어린 마음이 결여된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상징물이다. 조백헌은 작중에서 끊임없이 고된 일에 발벗고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한센병 환자들을 치유해서 정상인처럼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환자들을 대한다. 한편 이상욱은 조백헌의 이런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고 끊임없이 지적한다. 이상욱에게 동상은 비성상의 정상화를 위한 치료와 공동체화가 올바르다는 무형의 생각 그 자체다. 쉽게 말해 ‘정상인’에 대한 정의 자체가 ‘비정상인’이 존재함을 시사하기 때문에 ‘비정상' 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정상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고 바라본다. 조백헌은 조백헌 본인이 생각하는 동상을, 끝까지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물리적 동상을 세우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며 경계한다. 이상욱은 조백헌에게 이상욱이 생각하는 동상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설명한다. 조백헌은 자신의 신념을 뒤엎을 수 있는 멋진 사람일지 모르지만, 조백헌이 경계하는 동상과 이상욱이 경계하는 동상이 가진 의미가 달랐기 때문에 소통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상욱이 말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합을 강조하는 조백헌을 미워할 수도 있고, 옆에서 깔짝거리면서도 문제해결을 위한 그 어떠한 묘수도 내놓지 못하고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이상욱을 미워할 수도 있다. 한편 이상욱과 조백헌의 갈등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조백헌이 추상화하여 마음 속에 가진 동상의 의미와, 이상욱이 추상화하여 마음 속에 가진 동상의 의미가 달랐기 때문에 추상이 다르면 서로를 신뢰하고 피드백을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수용하더라도 문제해결에 이르는 소통이 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책의 마지막까지도 결혼식 주례를 연습하는 조백헌은 정상인과 환자(비정상인)의 결혼을 의미있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음은 한 권에 걸친 이상욱의 피드백에도 이상욱이 경계하는 동상이 건재함을 시사한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는 두 주인공의 대화가 서로의 이념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조백헌을 괴롭힌 이상욱의 이야기는 가랑비에 옷 젖듯 조백헌의 정책에 스며들었고, 결국 이상욱이 원하는대로 환자들이 집단이 아니라 개개인의 인격체로 바뀌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상욱은 조백헌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본인의 사상을 온전히 표현하지도, 그 사상이 원생들에게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해왔다는 한계를 가지는 동시에(참고4,참고5), 조백헌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동일성의 폭력에 대해 끊임없이 확인하며 조백헌이 더욱 많이 고민하고 더욱 많이 행동하도록 유도하여 섬의 어떠한 변화를 만들었다는 모순적 의의를 동시에 가진다.
조백헌을 ‘훌륭한 개발독재자’라고 평가받곤 하는 박정희에, 그를 비판하는 지식인을 이상욱에, 원생들의 생활수준을 일제 강점 이후 초토화된 대한민국 경제에 투영해 보자. 동상에 담긴 두 가지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볼 수 있을 것이다.
간척지가 한눈에 보이는 기념공원. 공사를 하는 원생들의 모습도 조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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